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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구와 욕망은 제거의 대상이 아니라 선하게 사용해야 한다

by 빅보드101 2024. 5. 6.

창세기 1장의 구조와 내용

 

오늘은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창조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도 있겠지만, 여기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를 알게 되면 내용이 더 풍성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와 욕망에 대해 창세기 1장은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도 같이 살펴볼 것입니다. 나의 감정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유용한 정보일 것입니다.  

 

1. 창세기 1장에 나타난 창조의 순서와 내용

  • 3절 : 빛
  • 6절 : 궁창
  • 9절 : 물이 한 곳(바다) / 뭍(육지)
  • 16절 : 큰 광명체(해), 작은 광명체(달), 별
  • 20절 : 물들은 생물을(물고기) / 새
  • 24절 : 땅의 짐승(동물, 사람)
  • 27절~28절 : 사람

여기서 창조의 구조를 살펴보면, 첫째 날 빛을 만드셨습니다. 이는 해나 달이 내는 '빛'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3절에서 말하는 빛은 근본적인 빛을 의미합니다. 이 빛은 어둠의 반대 개념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빛과 연결되는 것이 넷째 날의 광명체입니다. 그리고 둘째 날에 궁창을 만드셨습니다. 궁창은 하늘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늘 아래에 물은 바다를 의미합니다. 이것과 연결되는 것이 다섯째 날의 새와 물고기입니다. 새는 둘째 날에 만들어진 하늘에 있고, 물고기는 바다에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날 육지를 드러내셨습니다. 이는 여섯째 날의 동물과 사람이 살아가는 터전이 됩니다.

 

지금까지 내용을 정리하면, 첫째 날부터 셋째 날까지는 세상의 질서인 틀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넷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는 틀에 담기는 내용을 만드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완벽하게 설계된 구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창조의 절정인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사람이 창조될 때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었습니다. 이는 우리 안에 선한 형상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자유의지'로 하나님의 형상을 훼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의 자유의지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2. 사람에게만 있는 '하나님의 형상'과 '자유의지'를 어떻게 바라볼까?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자유의지로 하나님의 형상이 손상되었기 때문에 자유의지를 없애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유의지가 있어서 잘 못 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핵심은 자유의지를 잘 못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자유의지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목표는 자유의지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선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훈련해야 하는 것입니다. 

 

초기에는 자유의지를 잘 못 이해해서 '인간의 감정을 제거해야 한다'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감정을 드러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떠들지 마! 울지 마! 소리 지르지 마! 이렇게 사람의 감정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는 감정이 있는 인간을 로봇처럼 만드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반대되는 행동을 하면, 그냥 시키는 대로 순종하라고 하면서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는 종교인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는 좋은 종교인은 생각 없이 시키는 대로 순종하는 사람이라는 잘못된 공식을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부작용이 어디까지 확장되냐면, 헌금을 많이 한 사람은 천국에 가고, 적게 한 사람은 지옥에 간다는 세계관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이러한 전개를 통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간의 감정은 제거의 대상이 맞을까요? 인간에게는 수치심이 있습니다. 이것이 제거의 대상일까요? 아닙니다. 수치심은 없애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잘 이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열등감은 어떨까요? 나쁜 것일까요? 아닙니다. 열등감이 있어야 노력을 하고, 학생이라면 공부도 합니다. 

 

사람마다 자신의 단점이 있고, 연약함이 있기 때문에 겸손할 수 있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욕구와 욕망을 완전히 제거해 버리면 안 되는 것입니다. 만약 욕구와 욕망을 완전히 제거해 버리면, 사람들은 매일 씻거나 화장하지 않을 것입니다. 친절한 말투와 태도가 왜 생겨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상대방에게 사랑받고 싶은 욕구와 욕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랑받고 싶은 욕구를 잘 다루게 되면, 예의범절과 같은 것으로 잘 승화시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받고 싶은 마음을 매너와 같은 것으로 잘 포장하지 않으면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마치 어린아이와 같이 '나만 바라봐'라는 식의 잘못된 태도를 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가면을 쓰지 않고 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식의 가면, 학생의 가면, 부모의 가면 등 '페르소나의 과정'을 거치면서 가면이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성숙시켜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필요한 것이 '자유의지'입니다. 자유의지를 통해서 우리는 욕구와 욕망을 승화시켜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자유의지를 제거해야지만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사람인 것처럼 유도해서는 안 됩니다. 이는 의식 없는 순종과 맹목적인 믿음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욕구와 욕망을 선하게 사용

3. 하나님의 형상과 자유의지를 어떻게 해야 할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스스로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첫 번째 방법은 '말씀'을 읽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이 자유의지를 선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훈련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열등감, 수치심, 두려움 등을 완전히 제거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잘 사용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야 합니다.

 

두려워할 줄 알아야 죄를 짓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법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하게 깨달아 가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만약 모든 감정을 잘라내고 버리면, 공감하지 못하는 괴물만 남게 될 것입니다.  

 

우리 안에 죄라고 발견된 부분을 하나님께 회개하면 어떤 변화가 생길까요? 하나님이 그 죄를 암세포처럼 싹둑 잘라내고 제거해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감정과 이해력을 성숙시켜서 많은 사람을 돕고, 자기 자신도 살리는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형질이 바뀌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노란색인 아이가 초록색으로 바뀌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쓸모없고 거칠었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남을 섬기는 새사람으로 변화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게 진정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자신을 지워라',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에는 오해가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형상'까지 부인해 버리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완전히 껍데기만 남가 있는 상태가 될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를 부인하기 위해서 우리의 '자아'마저 없애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성령께서 임재하셨을 때 '담을 그릇'이 없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나 자신이 성령을 만나는 것인데, 나 자신이 없어진다면 성령은 그냥 지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성령의 필요를 느끼는 나 자신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창조의 섭리를 통해서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실 때 첫째 날부터 셋째 날까지는 틀을 만드시고, 넷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는 틀에 들어갈 내용을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만약 틀이 없어진다면 내용을 담을 그릇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틀과 내용이 모두 필요합니다. 이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틀이 없다면 아무것도 담을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오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훈련을 잘 받아야 합니다.

 

4. 정리하면, 결국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그 안에서 자유의지를 선하게 사용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없이 결정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무런 변화도 없고, 우리가 원하는 세계가 아닙니다.